어느 신부의 <일러두기> #6.
시카고 <한국 순교자의 모후> 성당
유승원 요한
바람의 맛
창을 연다. 침실, 거실, 주방 할 것 없이 눈에 보이는 창을 한꺼번에 열어젖힌다. 묵은 공기를 내쫓고 청소를 하려 한다. 대게 본당이나 사제 공동 숙소에는 조력자들이 있어 세탁기를 돌리거나 빗자루를 잡을 기회가 많지 않았으나, 요즘은 청소와 빨래, 식사 준비까지 혼자 스스로 한다. 거기서 그렇지 않았다고 여기서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불만은 전혀 없다. 불평을 늘어놓을 새도 없이, 지켜보는 이 없지만 지켜보란 듯이 한다. 진공청소기도 아니고 빗자루로 구석구석 쌓여 묵은 먼지를 쓸어 내고 대걸레를 빨아 물기를 바짝 짜낸 다음 바닥을 닦으면 그렇게 기분이 상쾌할 수가 없다. 청소해도 먼지는 늘 쌓인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눈에 띄지 않던 먼지를 쓸어 담으며 기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빨래는 세탁 후 대게 건조기를 돌려 마른빨래를 거두어 개킨다. 때로 빨래에 배인 햇볕 향을 맡고 싶으면 뒤꼍에 볕이 잘 드는 날 마른 향이 가득 스며들도록 의식을 치르듯 건조대를 펼쳐 수건만이라도 내다 건다. 빨래를 했을 뿐인데 눅눅했던 기분까지 마른다.
창을 열어 묵은 공기를 날려 보내고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느낄 때. 바람 한 점에 기억 한 줌이 날아든다. 날아든 바람은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나를 데려간다. 늦잠을 자려고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날에는 어김없이 어머니께서 방의 창을 활짝 여셨다. 환기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어머니의 반복되는 말씀이었고, 제발 다 자고 일어나거든 하시라 누차 말씀을 드려도 말하는 이만 있고 듣는 이는 없었다. 큰 방, 작은 방, 안방, 거실 할 것 없이 모든 문은 한꺼번에 열렸으니 달리 도망칠 방도 또한 없었다. 댓 발 튀어나온 입으로 오만상을 찌푸리며 투덜댔던 그 기억은 예전 바람에 날아갔는지, 어머니의 행동이 이제는 나의 방식이 되었다. 나도 몰래 내 어딘가 깊이 새겨 놓은 것처럼 내 기억에 각인되어 시키지 않아도 당연히 밟아야 하는 수순처럼 창은 열린다. 그리고 바람을 느끼고 맛본다. 이 상쾌함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나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다.
가톨릭교회의 성사에 대한 가르침은 이러하다.
“비가시적 하느님 은총의 가시적 통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이는 방식으로 전달해주는 것이 성사의 정의이다. 하느님의 은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이 어디 이뿐인가. 진, 선, 미, 사랑, 우정, 이런 것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랑을 담은 꽃 한 다발, 위로를 건네어 맞잡은 손길, 위험에 처한 사람을 대가 없이 돕는 조력 같은 행위 안에 담긴 마음은 눈에 띄지 않는다. 행위를 통해 그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사실 보이는 것, 그것은 별것 아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보이는 것을 능가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성사적 존재라 한다.
저 고정되어 있는 듯, 반듯한 교리로부터 배워 유연하게 적용해보자. 우리 삶에 성사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의 기억을 심어 놓을 수 있다면 삶이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우리 삶의 중요한 꼭지마다 그것을 떠올려 소환할 수 있는 것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마음을 담은 작은 선물을 준비한다던가, 정성스레 써 내려간 카드를 준비한다든가 하는 눈에 띄지 않아 기억조차 흐릿한 소소한 일을 통해 그때의 숨겨진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을 준비하자는 것이다. 첫 직장 출근 기념으로 선물 받은 넥타이를 매며 그날에 다짐했던 마음을 떠올린다던가, 결혼기념일에 받은 빨간 장미 한 송이는 타인의 집 마당에 맺은 꽃봉오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기억으로 데려간다. 물론, 언제나 물질적인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소소함은 우리를 위대하게 만든다. 기억은 그때, 그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바람 한 점이 다시 불러 드릴 수 없는 그 시간으로 우리를 소환하는 것처럼 기억은 힘이 세다.
창을 연다. 활짝 열고 묵은 공기를 내쫓고 청소하려 한다. 바람 한 점이 기억 한 줌을 나에게로 데려 온다. 오늘은 바람의 맛을 느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