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2022.
시카고 <한국 순교자의 모후> 성당
유승원 요한 신부
La Divina Commedia
옛 고 古자에 법 전 典자를 써서 시대를 초월하여 높이 평가되는 문학이나 예술작품을 우리는 classic - 고전이라 칭한다.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제목은 모두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읽지 않아 그 내용은 모르는 작품이라고도 입을 보탠다. 아무려나 읽지 않아 쌓여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단테 알리기에리의 작품 『신곡, La Divina Commedia』를 다시 읽는다.
이 ‘코메디아’는 총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가 ‘지옥’에 관한 내용, 두 번째가 ‘연옥’, 마지막은 ‘천국’에 관하여 단테는 노래하듯 운율을 살려 각 편을 모두 33편으로, 각 연은 3행으로 구성하였다.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네 가지 종말 – 죽음, 심판, 지옥, 천국에 관한 사말 교리의 내용이 담겨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첫 번째 편의 첫 번째 곡을 프롤로그로 치자면 총 100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인데, 단테의 이러한 구성은 숫자 3에 대한 남다른 집착이 엿보인다. 하필 왜 3일까. 삼위일체에 대한 강조라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유추 가능하다. 그리하여 『신곡』은 그리스도교적 사후 세계관을 단테 자신의 노래로 재현한 작품이다.
살아있는 자로서 ‘지옥’을 방문한 단테는 지옥문 앞에 새겨져 있는 비문 碑文을 맞이한다. 원문을 좀 더 운문화 하여 다시 적어 본다.
나를 지나는 사람 슬픔의 도시로, 나를 지나는 사람 영원한 비탄으로, 나를 지나는 사람 망자에 이른다.
정의는 지고하신 주를 움직여 신의 권능과 최고의 지와 원초의 사랑으로 나를 만드시었다.
나를 앞서는 피조물이란 영원한 것뿐이며 나 영원히 서 있으리.
여기에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려라.
저 비문이 지칭하고 있는 1인칭은 분명 ‘지옥’ 자신이다. 1인칭 대명사가 지칭하고 있는 대상에 ‘지옥’을 적용해서 한 문장만 다시 옮긴다.
“지옥문을 지나는 사람 슬픔의 도시로, 지옥문을 지나는 사람 영원한 비탄으로,
지옥문을 지나는 사람 망자에 이른다.”
한참을 들여다본 저 문장들에 간담이 서늘해지고 속은 징건하고 목덜미가 주뼛 선다. 나와 멀리 있는 것을 1인칭으로 다시 끌어당겼을 때에 명징하게 드러나는 것을 나는 지나칠 수 없다. 단테의 저 위대한 고전을 겨우 읽은 나는 혹여 나로 인해 슬픔에 든 자가 있는지, 나로 인해 영원한 비탄에 빠져든 생은 없는지, 나로 인해 슬픔에 빠지고 비탄에 들었다면 나 자신이 바로 ‘지옥문’이며, 내가 그의 생지옥이라는 뼈저린 성찰이 가슴에 와 얹힌다. 더욱이 생이 유지되는 동안 희망을 앗아 버렸으니 이 또한 그 탓을 어떻게 셈해야 할지 도무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아침에 현관을 나서며 옷매무새를 단정히 살피는 것처럼 아침 해가 떠오르고, 저녁달이 차오를 때마다 자신을 되짚고 없는 힘까지 다해 있는 힘껏 돌아보고 살필 일이다. 이렇게 내가 오래되어 먼지 묵은 것을 힘주어 읽는 이유는 시대를 넘어서도 통용되는 메시지를 길어 올리는 것이며 한 줌의 흙에서 온, 백 년을 사는 인간 육체에 천 년을 뛰어넘는 정신을 담아 놓은 불멸이자 재생을 확인하는 것이다. 당연히 무한의 정신을 유한의 육체가 다시 담아 읽어내는 것은 녹록지 않다.
병든 육식 동물만이 고기를 물리고 풀을 뜯어 먹듯 아픈 사람만이 성찰한다. 성한 사람에게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삶이 있으니 오지 않은지 모를 내일을 미리 당겨 염려할 뿐 지나간 시간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 그리하여 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의 자기반성도 하지 않으며 텍스트 안에서 컨텍스트 또한 찾지 않는다. 내가 걸어온 발자국을 유심히 살필 때 내가 걸어갈 길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을 알만한 사람이 이를 모르고 산다니 이것이야말로 웃지 못할 코메디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