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2022.
시카고 <한국 순교자의 모후> 성당
유승원 요한 신부
부치지 못한 편지
부치지 못한 편지 하나쯤은 담고 사는 것이 인생 아닐까. 수신자는 그 누가 되어도 좋겠다. 부끄러워 차마 소리 내어 발설하지 못한 마음에 단어를 입히고 문장으로 꾸미고 다듬어 내 안에 담아둔 것과 포개어지도록 하자. 앉아 써 내려가도, 엎드려 눌러 써 나아가도 좋다. 필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망설여진다면 차오른 숨을 고르듯 오른손 검지와 왼손 검지만으로 자판을 무심하지만 주의 깊게 하나씩 치는 것도 좋은 방도렷다.
날줄과 씨줄을 엮듯, 단어를 모아 조사를 붙이고 흩어지지 않는 문장으로 엮어서 적절한 문장부호로 완성한 편지는 부치지 않아도 좋겠다. 여기까지 들인 공과 애쓴 것을 생각하자면 욕심으로 부려 수신자의 이름 석 자를 지금 이곳으로 소환하듯 호명하며 겉봉 우측 하단에 적는 것이 순서이겠으나 끝이라는 말도 없이 끝나버린 편지도 나는 괜찮다. 다만 손에 거머쥔 그 편지를 여러 차례 다시 읽어보길 권한다. 마음과 단어, 단어와 문장, 문장과 문단 그리고 완성된 한 편의 편지와 마음의 거리는 예상치보다 멀다. 다시 읽고 또 읽지 않으면 그간 흐릿하였으나 이제 겨우 드러난 마음은 갈 곳을 잃고 마음과 단어와 문장 사이를 떠다니게 될 뿐이다. 그 부유하는 것을 그러모아 다시 들여다볼 때에 마음의 무늬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읽고 또 읽어 걷어 낼 것은 거두고 시간을 두어 가라앉는 것은 침잠하도록 두자. 그래도 채 살피지 못한 마음과 거두지 못한 단어와 미완의 문장 그리고 부치지 못한 편지에 대한 서글픔은 아래의 저 시인의 노래를 참고하자.
시인 유희경의 시집 『오늘 아침 단어』에서 “나는 사랑하고 너는 침묵한다”라는 문장으로 자신의 사랑을 노래한 바 있다. 저 짧은 시행에 대한 나의 해석은 이러하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연유로 너를 나로 끌어들여 나의 만족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침묵을 인정하는 것으로 발신과 회신을 대신한다.
나의 사랑에 너는 오늘 침묵할지라도.
사랑을 품은 이의 마음의 무늬는 응당 그 응답에 대한 기대이리라. 보낸 사랑에 되돌아오는 침묵은 어울리지 않는 연유이다. 그러나 주도면밀히 시인의 문장을 살펴보니, 소리 내지 못하고 담아 두었던 것을 문장화하여 침묵에 기대어 두는 것도 상대를 사랑하고 인정하는 조금 다른 형태의 발신인 셈이다. 심지어 저 문장 안에는 하느님께서 담겨 계신다. 우리 삶의 수많은 ‘침묵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늘, 항상, 변함없이, 항구한 사랑으로 품어주시기에 분명 그러하다. 그리하여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의 문장을, 나는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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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이어지는 몇 편의 단상은 시카고 외곽 어느 사목자의 세상 사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지칭하는 사물 事物 이란 물질세계에 있는 모든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존재를 통틀어 이른다. 보통 책의 맨 앞장 <일러두기>에 우리의 시선은 오래 머물지 않는 법. 허나, <일러두기>를 눈여겨볼 때에 본문은 좀 더 가깝게 다가온다. 이러한 방식이 모든 이들에게 해당된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그러하다.
이제 오래되고 낡아버린 벽에 갈라진 틈을 따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살펴보듯이 바라본 것과 바라보는 것, 바라볼 것을 용의주도하게 <일러두기>에 담으려 한다. 이름 모를 독자를 위하여 한 번에 한 글자씩 쓰겠다. 그러니 다만 말없이 읽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