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부의 <일러두기> #5
시카고 <한국 순교자의 모후> 성당
유승원 요한
먹고, 기도하고, 혁명하라.
여기 앉아 거기 읽는 자들에게 나는 쓴다. 쓰는 자로서의 나의 자의식은 쓰는 일에 있지 않다. 읽는 자로서 쓸 뿐이다. 읽지 않으면 나는 쓸 수 없다. 그리하여 읽었다. 읽어 버리고 말았다. 읽고 말았기에 생각을 고쳐 나는 다시 쓴다. 오로지 인간만이 읽고 쓰고 기록한다. 기록한 것은 한데 모아 다시 엮어 책으로 묶인다. 묶여 나온 책이 향하는 바는 읽는 자이다. 이것이 예비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때는 알지 못하였다. 알지 못한 채로 읽다가 다시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나는 읽었다. 읽어 버리고 말았다.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 는 그의 저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혁명은 곧 책을 읽고 쓰는 것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책은 사라지지 않기에 우리의 희망 또한 ‘책을 읽고 쓰는데’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읽는 것은 혁명이다. 모든 것을 전복하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곳을 향하는 혁명. 책을 펼쳐서 텍스트를 읽으면 그 자체로 사고가 확장되어 본인의 생각이 이전의 상태와는 다르게 되며, 텍스트를 읽는 행위 안에 이 모든 것은 고스란히 담긴다. 읽는다는 것이 여타의 다른 동물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인간 고유의 방식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 학자의 말은 결코 가볍게 넘길 만한 것아 아니다.
그의 논의를 천천히 되짚어 보자. 역사 안에 여러 번의 혁명이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물론 이 대혁명은 읽는 것과 관계한다. 촌부의 아들은 성경을 읽었다. 읽고, 다시 읽고,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기록되어 있는 것 그 어디에서도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교도권을 찾을 수 없었고, 면죄부를 판매할 권한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도달한 바는 이른바 16세기 ‘종교 개혁’ - ‘독일 혁명’, ‘대혁명’의 시작이다. 마니교에 빠진 아들이 있었다. 아들은 어느 날 아이의 노랫소리에 이끌린다. “집어 들고 읽으라!” 집어 들고 펼치자 눈에 들어오는 구절은 로마서 13장 13절~14절의 말씀이었다. 그는 읽었다. 펼쳐 읽은 그는 쇠망해가던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여인은 읽었다. 읽고 또 읽자 그녀 앞에 성현이 펼쳐진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에게 마치 펼쳐진 책처럼 될 것이다.” 읽은 자,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수도회 개혁 운동에 나섰다. 이 뿐인가. 문맹인 거상 앞에 천상의 전달자 나타난다. 기겁하며 달아난 상인은 아내의 설득 끝에 천사의 말을 받아 듣는다. “읽어라. 창조주이신 주의 이름으로. 읽어라. 너의 주는 더없이 고마우신 분이라, 붓을 드는 법을 가르쳐주신다.” 그에게 붓이 주어지고 “써라”라는 명령에 따라 쓰인 책이 이슬람 문명을 태동한『코란』이다.
앉아 읽는 자는 일어나 행동하는 거센 혁명을 꿈꾼다. 꿈꾸는 그 자리에서 그는 읽은 바를 다시 쓴다. 대부분의 수도원 규칙에 있어 근간이 되는 성 베네딕도의 금언은 이러하다. “ora et labor”. 곧,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규칙은 기도만 하라 말하지 않는다. 노동, 행동이 필수이다. 그러니 때로는 기도하는 손을 잘라야 한다. 가지런히 모아 기도하던 손은 이제 덮인 책을 받아 펼치고 힘주어 읽을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다시, 읽는 것은 혁명이다. 루터가 그러하였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러하였으며, 「근로기준법」을 읽어 버린 전태일이 그러하였다. 그는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었다. 눈을 씻고 번번이 읽어도 하루 15시간을 일하라는 말은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사사키의 질문은 여기에서도 유효하다.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둘 중 하나는 틀렸거나 미쳤다. 세계가 맞는다면 읽은 자가 미친 것이요, 읽은 자가 미치지 않았다면 세계가 틀린 것이다. 세계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인 물은 썩는다. 썩지 않으려면 흘러야 한다. 그러니 먹고 기도하고 혁명하라.
혁명을 꿈꾸는가. 읽으라. 다만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으라. 그리하여 쓰고 다시 쓰고 고쳐 쓰라. 읽는 자의 자리에서 혁명의 활시위는 당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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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아타루 (1973~)의 저서는 그 제목에 눈길이 먼저 머문다. 오늘 참고한 책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송태욱 역, 자음과모음, 2012)이고, 『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김소운 역, 여문책, 2017) 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본인의 견해를 기록하였다. 『춤춰라 우리의 밤을 그리고 이 세계에 오는 아침을 맞이하라』(김소운 역, 여문책, 2016) 는 철학과 번역, 춤, 음악, 회화, 사진, 만화를 아우르는 예술 전반에 관한 논의를 펼쳐 놓았으며, 이외에『이 치열한 무력을 :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안천 역, 자음과 모음, 2013),『제자리걸음을 멈추고』(김소운 역, 여문책, 2017), 『이 나날의 돌림노래』(김경원 역, 여문책, 2018), 등이 있다. 그의 책을 탐독한 나로서는 일독을 권하지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