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부의 <일러두기> #10
시카고 <한국 순교자의 모후> 성당
유승원 요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
매해 이맘때면 거르지 않고 찾아읽는 시가 있다. 전문을 옮긴다.
첫사랑, 여름
후덥지근한 교실의 여름과 절정의 여름,
레몬향이 넘실거리는 첫사랑의 맛이 나
햇살을 받아 연한 갈색으로 빛나던 네 머리카락,
돌아갈 수는 없어도 펼치면 어제처럼 생생한,
낡은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단편 필름들.
말미암아 절정의 청춘, 화성에서도 사랑해는 여전히 사랑해인지
밤이면 얇은 여름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네 생각을 하다가도
열기에 부드러운 네가 녹아 흐를까 노심초사하며,
화성인들이 사랑을 묻거든 네 이름을 불러야지 마음먹었다가도
음절마저 황홀한 석 자를 앗아가면 어쩌지 고민하던
그러니 따끔한 첫사랑의 유사어는 샛노란 여름.
2018년 제26회 대산청소년문학상 중등부 시 부문 동상 수상작인 유지원 학생의 시이다. 오감의 심상이 모두 담긴 문장들의 조합이 아름답다. 시각, 후각, 미각, 청각 모두가 과거를 향하고 있으나 읽는 이는 지금 여기서 이 모든 것을 느낀다. 나에게 어떤 단어 하나도 쉽게 넘어 갈 수 있는 것은 없으나 어느 문장 하나도 어려운 것이 없다. 그리하여 이 시를 마주하는 순간이면 한 여름의 무더위 따위는 아랑 곳 없다.
시에서 언급하고 있는 지구 밖의 행성과 있는지 없는지 나로서는 가늠할 길 없는 어떤 존재를 구체적으로 지목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지은 학생이야말로 외계인일지 모른다. 왜 그런 것이 있지 않은가. 지하철에서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에 열중할 때 두꺼운 양장본 책을 읽는 자를 보면 느껴지는, 낯익은 풍경을 불쑥 뚫고 나오는 낯섦 같은 것. 그러한 자를 지켜 볼 때 나는 생각한다. 같은 땅에 발을 딛고 같은 하늘을 이고 있으나 같은 행성의 존재가 아닌 다른 세상의 이방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한다.
모든 사물은 제 자리가 있다. 신발은 신발장에 있어야지 식탁 위에 있을 때 우리는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반대로 수저는 주방 서랍, 수저통에 있을 때에 수저로써 쓰임을 다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지원 학생의 첫사랑에 관한 노래는 제자리, 곧 유효함을 획득한다. 저 또래만이 간직할 수 있는 감수성으로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을 정도로 모든 문장은 완결된다.
지각 있는 자, 생각해보라. 30-40대의 설늙은이가 저 시를 지어 노래하였다고 한다면 그 반응은 지금과 같지 않으리라 나는 기어이 장담한다. 말하기 좋아하는 ‘말 부자’는 입을 보태어 흉을 잡아 입을 보탤 것이며, 입 달려 읽는 자는 분명 한번 읽어 덮고 다시 찾아 읽을 것을 기억하지 못하여 입을 닫을 것이다.
입 달려 읽는 자로서, 끝내 화성인을 만나지 않기를 나를 당부한다. 혹여 만나더라도 부디 사랑에 관하여 그이가 저이에게 묻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그의 첫사랑은 여전히 상큼한 여름으로 내내 남기를, 그해 여름은 그곳에 남아 있기를 나는 소망한다.
* 본고의 제목은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에서 따왔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김춘미 옮김, 비채, 서울,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