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부의 <일러두기>#7.
시카고 <한국 순교자의 모후> 성당
유승원 요한
고운 것은 더럽고, 더러운 것은 고웁다.*
이마에 새겨 넣은 빈디 bindi 조차 희미해진 누추한 차림의 이름 모를 촌부가 다가와 손바닥을 위로 향해 흔들며 내민다. 박시시 baksheesh 를 원하는 것은 그 ‘동네’에서는 흔하디 흔한 일이니 길을 막아서 손을 내민다고 당황할 일은 아니다. 닳고 닳은 백패커 back-packer 는 동전을 찾아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다 크고 맑은 눈망울로 바라보는 그 천진난만함에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반대로 빈 손바닥을 촌부에게 향하며 그는 말한다.
“이번에는 당신이 나에게 박시시를 하는 건 어때?”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일절 당황하는 기색 없이 동냥하던 두 손을 모아 복을 비는 말과 함께 동전 두 닢을 상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며 환한 치아를 드러내 밝게 웃는다.
도덕경 2장은 전한다. 일부를 옮겨 적고 부드럽게 풀이해본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斯不善已.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선한 것을 선한 것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선하지 않음이 있다는 것이다.
유와 무는 서로를 살게 해주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어주며
길고 짧음은 서로 비교하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의 관계에서 비롯하는 것
악기 소리와 목소리도 어울리며 관계하고 앞과 뒤도 서로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
미추, 선악, 유무, 장단, 고저, 전후가 상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개념이란다. 아름다움이 있어야 추함을 볼 수 있고, 선함이 있어야 악함을 분별할 수 있으며 있음이 존재해야 비로소 없음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아가, 길다고 하는 것은 짧은 것이 있을 때만 가능하고, 짧다고 하는 것도 긴 것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길다’, ‘짧다’ 하는 것은 독립적인 단독 계념이 아니라 서로 불가분의 상대 개념이니. 옳거니, 길다고 하는 것도 그보다 더 긴 것에 비하면 짧은 것이요, 짧다고 하는 것도 그보다 더 짧은 것에 비하면 긴 것이 되는 법. 한 가지 사물이 서로의 관계에서 길기도 하고 동시에 짧기도 한 탓이다. ‘양극의 조화’, ‘반대의 일치’ 라면 모순일까. 아무려나, 이런 연유로 두 계집종이 잘잘못을 다투다 어느 정승에게 와서 고하자 두 계집 모두에게 서로의 주장이 옳다고 하니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조카가 ‘하나가 옳으면 다른 하나는 그른 법인데 어찌하여 둘 다 옳다고 하시느냐’는 말을 듣고 ‘네 말도 옳다’라고 했다는 그의 일화가 이제 이해된다.
구걸하는 이에게 다시 손을 내미는 순간 기대와는 다르게 손바닥에 올려진 동전을 통해 별안간 나의 인식과 세계가 만천하에 드러나 들켜 버렸다. 주는 이로서 나는 받으려 했으나, 거기에는 주는 이들만 있을 뿐 받기만 하는 이는 없었다. 아름다운 것 안에 추함이 담겨 있고 없음에 있음이 포함되며 긴 것은 짧기도 하고 높은 것은 순간 낮아지며, 앞이 뒤가 되는 것처럼 주기만 하는 것은 없고 받기만 하는 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줄 수 있는 것은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받는다는 것은 언제든 다시 되돌려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하나에 매몰되어 다른 하나는 놓치고 지나친다. 물론, 붙잡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이 잘못이라 탓할 수는 없지만 살뜰히 챙겨 양방향을 볼 수 있다면 그만큼 우리의 시야는 확대되고 넓어지리라. 확대하고 넓혀서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보인다. 우리를 만드신 분께서도 숨어 있는 듯 드러나고, 드러나는 듯 숨어 계시기도 하다. 그러니 세상을 바라보는 해상도를 높여야만 한다. 흐릿하게 사는 것보다 선명하게 사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니 슬퍼말자. 누군가에게 나는 기쁨이려니. 그러니 부러워 말자. 누군가에게 나 또한 부러움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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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의 3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의 세 마녀의 노래에서 따왔다.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글라미스의 영주 맥베스 앞에 검은 세 마녀는 노래한다. “고운 것은 더럽고, 더러운 것은 고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