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 2022
시카고 <한국 순교자의 모후> 성당
유승원 요한
당신의 죽음, 얼마인가
인도 갠지스 강을 따라 걷다 보면 여기저기 화장터를 볼 수 있다. 현대식 화장터도 있지만, 장작더미 위에 시신을 올려 뉘이고 노상 곳곳에서 화장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여기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거기에서는 그렇다. 그 강가에 앉아 시신이 타는 모습을 한참 동안 가만히 보았다. 한참을 탄다. 진종일 탄다. 쉬었다 타는 법 없이 계속 탄다. 해가 져도 사그러들지 않는 불꽃은 환하게 타들어 간다.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이 파란 불꽃에 휩싸여 소멸하는 모습은 황망한 느낌 없이 다만 고깃덩어리가 타들어가는 것과 별반 차이를 찾을 수 없었다. 보기에는 그렇게 보였다.
다 타버리고 남은 재를 다시 들여다보면 무엇이 저리된 것인지 도통 알아내기 어렵다. 파묘를 지켜보고 추모공원 화장시설에서 기계식 화장도 지켜보았다. 모양도 크기도 수량도 전부 사라지고 오로지 타고 남은 재만이 남는다.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크기는 어떠했으며 무게는 얼마나 나갔고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쌓이는 궁금증 앞에 놓인 것은 모든 것이 감추어져 있는 한 줌의 재뿐, 묻고 싶어도 답하는 이는 이제 거기에 없다. 형태가 바뀌니 보였던 것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똑같은 방식으로, 형태가 바뀌니 보이지 않았던 것 보이게 되었다. 한 줌의 재, 그 먼지 안에 한 사람의 우주가 고스란히 담겨 남아 있다. 양손에 담기지만 깊이도, 넓이도, 무게도, 질량도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한 우주가 감추어져 펼쳐진다.
불가능한 방식으로만 가늠 가능한 한 사람의 죽음, 그것은 한 세상의 소멸이고 한 세계의 멸망이다. 아무리 소소한 인생이라도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거대하고 성스러운 우주가 담겼다. 그러니 죽음은 한 우주의 소멸이고 한 우주의 멸망이다. 생명과 죽음은 결코 추상적 개념일 수 없다. 그것은 회복 불가능하고 대체 불가능한 일회적 존재의 지상에서의 영원한 사라짐이며 한 개인의 횡사는 세계 전체의 무너짐이다. 이제 나는 묻는다. 당신의 죽음은 얼마인가. 값을 따질 수 없는 것을 물어 셈할 때에 나는 서글프다.
꽃 피는 4월이 되면 떠오르는 이들이 있다. 다시는 발설하고 싶지 않아 그 이름을 차마 입에 담지 못하고 억지로 쓴 몇 문장으로 대신 할 수 없는 비운에 내 방식의 위로를 감히 더한다. 그 때에 속보를 지켜보는 이들은 비명에 가까운 세 음절만 연신 내질렀다. ‘아이고. 아이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 음절에 담긴 뉘앙스가 바뀌었다. ‘아이고, 언제적 이야기를 아직도 우려먹습니까.’ ‘아이고, 이제 그만 좀 합시다.’ 이런 말 같지 않은 말은 속으로 혼자 삼키다 누군가 발설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입이 보태지고 말이 모여 터진다. 그러니 입을 보탠 이들만을 힐난하고 질책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나는 진심으로 생각한다.
남겨진 이름표를 손에 쥐고 이름 석 자를 목 놓아 불러도 돌아올 리 만무한 속절없는 침묵 앞에 손익을 따지는 것은 유해하다. 죽음 앞에 그것은 예의가 아니다. 나를 능가하여 너를 인식하고 남의 어려운 처지를 제 일로 끌어안아 가엾이 여기는 것이 동정 同情. sympathy이다. 동정심이야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 아닌가. 전신주에 붙은 집 나간 강아지를 찾는 전단만 보아도 안타까운 마음이 이는 것이 사람 아니던가. 하물며 마른 옷을 입혀 보냈는데 젖은 옷만 돌아왔다. 아니 아직 되돌아오지 못하였다. 저 축축하고 눅눅한 기억 앞에 나는 다시 묻는다. 당신의 죽음은 얼마인가.